[기자수첩]천재와 오지랖

 대한민국 굴지의 회사에 다니는 B 차장은 머리가 좋다. 컴퓨터와 통계학을 꿰뚫는다. 연구원들은 ‘천재’ B 차장을 존경한다. 같은 연구소의 K 대리는 ‘오지랖’이 넓다. 연구형 인물은 아니지만, 수천명이나 되는 조직원 한 명, 한 명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한다. 문제가 생기면 누가 전문가인지 잘 알아 각종 민원을 처리하는 창구 역할도 한다.

 천재와 오지랖. 어느 형이 기업에 더 필요할까. 이건희 전 삼성 그룹 회장은 천재론을 설파했다.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1명의 천재가 1000명, 1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고도 당연히 천재형 인간이 아닐까 싶지만 요즘 들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먼저, 기업들의 아우성 때문이다. “요즘 무엇인가 새로운 제품을 내놓으려고 난리지만, 이미 남들이 다 개발해 놓은 것뿐입니다.” 인류가 엄청나게 발전한 지금, 천재 한 명이 세상을 뒤집을 만한 제품을 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로또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희박한 확률 게임이다.

 컴퓨팅 학계 한 박사의 말도 이러한 의구심에 더욱 불을 지폈다.“컴퓨터라는 학문도 거대해져서 한 사람이 새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기 어렵습니다. 수적으로 많은 중국 과학자들은 정보를 활발히 교환하고 공동 연구 기회도 많아서 성과를 내기에 유리하지요.”

 그러고 보면, 앞서 우문의 답은 천재보다는 오지랖이 더 맞을 수도 있다. 21세기에 필요한 인재는 혼자 똑똑하기보다 다양한 사람과 어울려 협력하는 인간이다. 금융회사 HSBC는 와인펀드를 기획할 때, 펀드 전문가와 사내 와인 애호가와 연결하는 새 형태의 협업을 고민했다. 실제로 혁신을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요즘 ‘협업’이 화두다.

 이 전 회장이 천재론을 설파한 것은 1994년이다. 15년 전 인재관이다. 인터넷이 등장해 수많은 사람과 사람, 지식과 지식이 연결되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아이디어가 샘솟는 일이 없었던 시대의 말이었다. 이건희의 ‘천재론’도 이제 발전적으로 폐기돼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류현정기자·국제부 dreamsho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