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용 블랙박스 `양날의 칼`

 차량용 블랙박스 장치에 기록된 교통사고 장면. 내년에 수도권 상용차에 블랙박스가 의무화되면서 운전자와 자동차 회사 모두 예기치 못한 법적 논란에 휩싸일 전망이다
차량용 블랙박스 장치에 기록된 교통사고 장면. 내년에 수도권 상용차에 블랙박스가 의무화되면서 운전자와 자동차 회사 모두 예기치 못한 법적 논란에 휩싸일 전망이다

사례: 지난 5일 서울 목동의 혼잡한 퇴근길. 택시가 갑자기 급발진 사고를 일으켰다. 운전사가 브레이크를 밟아지만 택시는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앞 차를 두 번이나 받은 후에 멈췄다. 택시경력 12년차의 운전사는 억울하지만 수리비 일체를 물어줘야 했다. 어쩔 수 없는 급발진 사고라고 호소해도 보험사, 자동차 회사에 입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택시에 탔던 승객도 운전수 편을 들어줬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차체결함으로 교통사고가 났을 때 운전사가 입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급발진 사고는 심증은 있어도 정확한 물증은 없다. 그동안 자동차 제조사는 운전자가 실수로 가속페달을 밟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내년부터 운전자들의 억울한 피해는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정부는 교통사고감소를 위해 내년 하반기 수도권의 택시와 버스, 트럭 등 상용차에 차량용 블랙박스 장착을 의무화한다. 블랙박스에는 주행속도, 가속페달(RPM), 브레이크, GPS위치정보, 조향각도를 100분의 1초마다 기록한다. 전후방 카메라의 사고영상기록도 가능하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의 잘못인지 디지털 파일로 완벽한 상황재현이 가능하다. 가속페달을 밟지 않았는데 차량이 튀어나간 주행기록도 당연히 남는다. 급발진 사고를 낸 운전자가 덤터기를 뒤집어 쓰는 것이 아니라 블랙박스 운행자료를 근거로 자동차 제조사에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할 수도 있다.

국내 완성차 업체 관계자들은 내년 하반기 차량용 블랙박스 의무화가 가져올 ‘예상치 못한 경영상 리스크’를 적잖이 우려한다는 소문이다. 그동안 숨겨왔던 차량결함이 블랙박스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는 상황이 달갑지 않다. 교통사고 감소를 위한 블랙박스를 의무화한다는 정부 정책에 반대할 명분도 없다. 완성차 업체가 고양이 목에 스스로 방울(블랙박스)을 채우는 격이라고 전문가들은 비유한다.

차량용 블랙박스의 확산은 완성차 회사 뿐 아니라 운전자들도 새로운 법적 논쟁에 휘말리게 할 전망이다. 자기 실수로 교통사고를 냈을 때도 블랙박스 자료를 경찰당국, 보험사에 제출해야 하느냐 여부는 논란거리이다. 모든 택시에 영상기록장치를 장착한 인천에선 택시 교통사고가 나면 경찰들은 영상기록이 담긴 메모리카드를 현장 증거로 무조건 압수한다. 한 택시기사는 교통사고가 나자 블랙박스에 빈 메모리 카드를 끼워놓고선 고장이라고 발뺌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차량용 블랙박스를 개인이 장착했을 경우 자신에게 불리한 운행자료의 제출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법적 해석도 나온 바 있다. 전문가들은 차량용 블랙박스가 교통사고 감소에 효과가 있겠지만 새로 등장할 법률상 문제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한 목소리로 지적한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