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리포트]테스트마켓으로 뜨는 영국

[글로벌리포트]테스트마켓으로 뜨는 영국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 위축으로 연결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고, 전문가들은 달러화 가치의 하락과 기축통화로서의 지위 약화를 예상하고 있다. 외환 거래에서 달러화 비중이 지나치게 높고, 신흥시장 성장 덕에 개선됐다고 하나 여전히 대미 수출 비중이 큰 한국은 교역처를 다변화해야 한다. 또 한류로 대표되는 문화콘텐츠 수출도 아시아권을 넘어 세계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국 시장이 갖는 테스트마켓으로서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해 본다.

 영국은 세계 5위 경제규모의 큰 시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진입 비용은 미국에 곧바로 진출하는 것보다는 덜하다. 일단 지리적으로 미국만큼 광활하지 않고 지역 특성이나 격차도 심하지 않은 반면에 소비자 계층은 다양해 테스트마켓으로 좋은 환경 요건을 갖췄다. 초저가 마트인 파운드숍을 주로 찾는 저소득층부터 축구 스타나 러시아 재벌까지 부대끼며 사는 곳이 영국이다. 무슬림 인구도 급증하고 있어 중동, 중앙아시아 시장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영국 시장이 더 넓은 시장에 주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1960년대 이후 제조업이 쇠락한 것이 오히려 공산품을 보는 소비자의 눈높이를 더욱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자국산 제품이 없다 보니 공산품 시장이 활짝 열려 있고 경쟁이 치열하다. 경쟁은 테스트마켓이 가져야 할 필수 덕목이다. 자동차 시장을 예로 들면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브랜드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미국에 진출하지 않은 유럽 브랜드는 물론이고 일본 내수용 차나 호주 자동차가 팔리고, 유럽에서 냉대당하는 미국산 차도 많다. 규제가 적고 통신서비스 시장 진입이 자유로운 이동통신 선진국답게 최신 휴대폰종이 가장 먼저 출시되는 곳도 영국이다. 애플의 아이폰은 아이팟과는 달리 국가별로 출시 시기가 크게 다른데, 미국 밖에서 처음 출시된 곳은 영국이다.

 LG·삼성·노키아도 영국 시장을 휴대폰 테스트베드 및 유럽시장 거점으로 적극 이용하고 있다. 삼성 옴니아폰, LG 프라다2 등 일부 제품은 국내보다 영국에서 먼저 발표됐다. 발달한 컨벤션 산업과의 시너지 효과도 대단해서 첨단 제품과 관련한 크고 작은 전시회와 발표회가 열리고 있다. 최근 ‘스마트폰쇼 2008’ ‘노키아 리믹스’ 등이 런던에서 열렸다.

 외산 제품을 꼼꼼히 골라 사용해야 하기에 언론도 자국산 상품에 관대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여러 상품을 마음껏 비교하고 비판하는 풍토가 자리 잡았다. 영국에 유난히 상품 평가를 전문으로 하는 미디어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국인은 보수적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최신 기술을 향한 관심과 수요는 최고 수준으로, BBC 뉴스 채널에 첨단 IT 신제품 소개 프로그램이 매일 편성돼 있을 정도다. 자연스럽게 같은 영어권인 미국은 물론이고 가까운 유럽 소비자도 영국 언론의 평가와 시장 반응을 참고한다. 영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 더 큰 미국 시장과 다른 유럽 시장에서의 성공을 자신해도 좋다. 선진국 시장뿐 아니라 한국 기업들에는 개척할 여지가 많은 지역인 인도·중동·아프리카·동남아시아 그리고 호주 시장에의 영향력도 대단하다. 과거 영국이 진출했거나 지배했던 영연방 국가는 대부분 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이 나라들의 기업가, 정치인 등 여론 주도층은 영국에서 교육받고 계속 영국을 왕래하며 지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공산품뿐 아니라 문화콘텐츠 역시 영국을 통하는 길이 미국을 포함, 전 세계로 확산하는 데에 지름길이다. 팝 음악계에서 영국 아티스트의 강세가 이어지고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 첫 편은 영국에서의 히트를 발판으로 1년여 뒤 미국에 진출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학술 서적도 예외가 아니다. 장하준 캠브리지대 교수의 책들은 영국에서 발표됐기에 그를 세계적인 제도경제학자로 자리 매김시킬 수 있었다. 매년 이맘때면 노벨 문학상을 혹시 한국인이 수상할지 기대하는 모습이 보인다. 더 많은 한국 작가의 작품이 영역돼 영국에서 출판하기 바란다. 후보로 거론되던 일본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국에 살고 있지만 영국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영국은 제조업이 쇠락한 대신 각종 서비스산업 경쟁력이 높아 한국 기업이 뚫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러나 과감히 도전한다면 배울 점이 많고 서비스 부문의 확대는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에도 추가적인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 중·미·일에 치우친 경제활동 대상을 유럽·아프리카·중동 등으로 확장하려면 영국을 다시 보라.

브라이턴(영국)=박상욱

서섹스대학 과학기술정책연구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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