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R&D센터 유치 `용두사미`

지난주 한국을 방문한 톰 쇼도프 BMC 아·태총괄 사장은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그는 “한국에 투자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면서 “따라서 한국에 연구개발(R&D)센터를 설립할 계획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 술 더 떠 “한국에 진출한 대부분의 소프트웨어(SW) 업체의 R&D센터는 생색내기용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듣는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고약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자기네 판단에 따라 투자를 안 하기로 했으면 됐지 타 업체의 센터가 ‘생색내기용’이라고 폄하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한국 정부가 투자를 강요하다시피 했지만 그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은 더욱 가관이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 들어가 보면 그렇게 화낼 일만도 아닌 것 같다. 사실 IMF 이후 우리는 다국적 기업의 투자를 갈망했고, 이를 위해 대통령까지 나설 정도였다. 참여정부도 마찬가지다. 참여정부 최장수 장관 기록을 세운 진대제씨는 아예 세계적 IT R&D센터를 유치, 핵심 원천기술을 확보해 동북아 IT허브로의 도약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공표했다.

 인텔·IBM·HP·MS·선마이크로시스템스·오라클 등이 R&D센터 구축 대열에 참여했다. 지멘스·AMD·모토로라·BEA 등도 나섰다. 모두 15개가 넘는 IT기업이 한국에 R&D센터를 설립하기로 했다. 정부가 앞장 선 결과였다.

 하지만 연초 인텔의 R&D센터 철수에 이어 사이베이스·BMC 등이 설립 계획을 백지화했다. 대부분의 다국적기업 R&D센터 역시 실상은 고객지원센터 수준에 불과하다.

 일각에서는 단지 삼성·LG·SKT 등 대기업 수요를 겨냥한 것일 뿐이라는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글로벌 시장 지배력이 높은 반도체·디스플레이·휴대폰 분야의 임베디드SW 같은 기술적 수요에 대비하는 차원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나올 리 없다. 다국적기업으로서도 매력이 많지 않다. 미·일과 중·인도 사이에서 하도급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첨단산업의 샌드위치 상태에 놓인 나라가 어디 눈에 차겠는가.

 쇼도프 사장의 언급은 그런 점에서 뼈 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비즈니스 관점이 아닌 한국 정부의 강요에 가까운 투자인만큼 ‘생색내기’에만 그쳤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이미 800여개의 다국적기업 R&D센터를 유치했다. 앞으로도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인도 역시 수없이 많은 다국적 기업이 몰려들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행렬은 앞으로 계속될 전망이다.

 최근 들어 부상하고 있는 북유럽 소국 에스토니아도 마찬가지다. 1991년 독립한 인구 135만명의 이 작은 나라는 IT를 성장동력으로 삼고 다국적 기업들을 유혹했다. 각종 세제 혜택은 물론 수많은 규제를 철폐했다. 전문인력의 숙련도는 세계적 수준이며, 임금 수준도 매력적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루마니아 등 동유럽도 매력이 넘친다. 당연히 외국기업이 몰려들고 있다.

 정부의 정책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 장관이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 몰두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규제완화·세제지원 등을 포함, 기업하기 좋은 총체적인 동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용두사미(龍頭蛇尾)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차라리 쇼도프 사장의 발언은 솔직하다. 상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문이 남지 않는 곳에 투자할 리 만무하다. 인텔이 R&D사업에서 철수한 것이나 BMC가 투자를 거부한 것은 이를 증명한다. 획기적인 유인책이 아니면 안 된다. R&D센터 유치정책을 국가 IT산업 발전전략의 차원에서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봐야 할 시점이다.

◆박승정 솔루션팀장 sjpark@etnews.co.kr